
더 플로리다 프로젝트 – 디즈니랜드 그림자에 핀 빈곤 리얼리즘
플로리다 올랜도의 주홍빛 햇살은 언제나 “마법왕국”이라는 간판을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쇼ーン 베이커 감독이 카메라를 들이댄 곳은 디즈니월드 입구에서 겨우 몇 마일 떨어진 보라색 모텔 ‘매직 캐슬’이다. 여기서는 햇살이 동화의 배경음이 아니라 가난의 세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명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 시점은 여섯 살 소녀 무니의 눈높이다. 무니는 콘크리트 벽에 쨍한 분홍과 보라색을 칠한 모텔을 ‘성(城)’으로, 곰팡이 냄새가 밴 복도를 ‘탐험 코스’로 바꾼다. 그녀에게 이 거대한 주차장은 아프리카 사바나나 다름없고, 공터에 방치된 유틸리티 기기는 롤러코스터보다 짜릿한 놀잇감이다. 감독은 이처럼 ‘아이들의 상상력’이라는 필터를 통해 낡은 풍경을 환상적으로 포장해 보여 주지만, 이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관객은 콜센터 수화기 너머 반복되는 체불 독촉, 복지 사무소 창구에서 잘려 나가는 푸드스탬프, 그리고 주마다 돌아오는 주거비 결제일이 뿜어내는 질식할 듯한 음압을 듣게 된다. 이때 영화는 놀랍도록 냉정하다. 절망을 짜내 눈물로 얼룩지게 하기보다, 최소한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관객과 인물 사이에 ‘관찰자의 창’을 세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처절하다. 우리는 자폐증에 걸린 듯 별세계에서 신나게 소리치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보며 “그래, 아직 아이들은 꿈꿀 수 있잖아”라고 중얼거린 순간, 곧바로 저녁이 되면 팔찌를 훔치려는 엄마 헨리의 손가락과 베드버그가 파고든 이불을 마주친다. 디즈니월드와 모텔 사이의 ‘출입금지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냄새와 소음, 그리고 단전(斷電)과 단수(斷水)가 경계선을 철저히 긋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보이지 않는 선을 이토록 광휘(光輝)로, 그다음 순간 곧바로 암흑으로 바꿔 놓는다. 이 급격한 명암 대비야말로 영화가 보여 주는 빈곤 리얼리즘의 핵심이다.
더 플로리다 프로젝트 – 무니·헨리 모녀의 서툰 생존기
헨리는 스물두 살에 가까스로 ‘어른’의 자격을 받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준비 기간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팔뚝엔 헐거워진 문신이 있고, 손목에는 체불된 숙박비 영수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무니가 아침마다 먹는 건 값싼 설탕시럽에 담근 와플 조각, 점심에는 매직 캐슬 뒤편 쓰레기통 옆에서 친구 애슐리에게 얻어오는 치킨, 그리고 저녁엔 냉장고에 남은 단맛 강한 시리얼 한 움큼이 전부다. 헨리에게는 ‘선택’이라 불릴 만한 사회적 옵션이 거의 없다. 동네 식당은 이미 비정규직만큼도 남아 있지 않고, 테마파크는 정규직 직원 ID가 없으면 면접장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생존법은 길거리에서 블랙 마켓 향수를 파는 일과, 모텔 침대 시트를 접어 두고 손님을 받는 일이다. 영화는 헨리의 선택을 윤리·비윤리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구조 속에서 다른 선택이 가능한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던진다. 무니가 동네 슈퍼에서 우유와 오렌지 주스를 살 수 없는 이유는 엄마의 게으름이 아니라, 총액 800달러가 넘는 주간 숙박비가 구조적으로 저소득층을 얼어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상이 가차 없이 포착하는 것은 모텔 프런트 데스크 위에 붙은 ‘일주일 숙박료 선결제’ 공지문, 그리고 입주민들을 향해 “늦으면 즉시 퇴거”라고 적힌 붉은 스티커다. 더 잔혹한 것은 헨리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무니 앞에서는 끝까지 ‘쿨한 언니’처럼 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니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이 헨리인 만큼, 한 번의 눈물도, 한 차례의 절망도 허락되지 않는다. 관객은 헨리가 모텔 욕실에서 손님을 돌려보낸 뒤 소독제를 뿌리며 울음을 삼키는 장면을 엿본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가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으며, 생존은 끊임없는 자책과 변명, 그리고 어린 딸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다.
더 플로리다 프로젝트 – 바비가 보여준 ‘진짜’ 휴머니즘
매직 캐슬의 관리자 바비는 자주 티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주차장을 돌아다닌다. 탁상 행정 직원이라기보다는 설비공과 경비원의 혼종(混種)이다. 그는 매주 숙박비를 밀린 세입자에게 영수증을 들이밀어야 하지만, 동시에 밤마다 트랜스젠더 노숙인이 공용 욕실에서 씻을 수 있도록 눈길을 돌려 준다. 낮에는 건물에 몰래 숨어든 성범죄 전과자를 찾아내 경찰에 신고하고, 저녁에는 무니와 친구들이 엘리베이터 벽에 낙서한 것을 조용히 지운다. 영화는 바비에게 눈물겨운 과거사를 붙여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몇 초짜리 시퀀스로 그의 인간성을 스케치한다. 예컨대 헨리가 매춘 고객에게 폭행당할 뻔하자 바비는 곧바로 뛰어가 손님을 몰아낸 뒤, 헨리에게 “방에 들어갔다가 다친 손목 얼른 씻어”라고 낮은 목소리로 일러 준다. 또 한 번은 디즈니월드 ‘매직밴드’를 도둑맞았다는 남자가 모텔 복도를 어슬렁거리자, 그는 손에 망치를 들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그 뒤에서 무니가 슬쩍 내민 손에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쥐여 준다. 이중적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동체를 위한 위험 관리와 아이에 대한 보호 본능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다. 바비의 휴머니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데스크 의자를 나란히 붙여 OST 선반을 만들고, 폭염이 심한 날에는 폐타이어를 물통 삼아 아이들을 위한 간이 풀장을 마련하는’ 식의 세심한 행동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무니가 가정복지국 직원에게 끌려가는 날이다. 바비는 서류를 든 공무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모텔 규정상 방세 미납자에게 빈방을 내줄 수도 없고, ‘아동 방임’ 혐의로 조사받는 보호자를 두둔할 수도 없다. 대신 복도 난간 밑에서 우물거리며 “헨리, 무니 잘 챙겨…”라고 중얼거린다. 법과 규정, 그리고 가난의 톱니바퀴 사이에 서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시민의 얼굴이다. 바비는 손을 내밀지 못했지만, 그의 멈칫거림 속에는 ‘도울 수 없는 사람의 깊은 무력감’과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연대’가 뒤섞여 있다. 휴머니즘이란 결국 완벽한 구원보다, 손쓸 새 없이 무너지는 옆집을 끝까지 바라봐 주는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걸 바비는 몸으로 보여 준다.
더 플로리다 프로젝트 – 부끄러운 생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나는 한동안 극장 좌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무니와 제이시가 손을 맞잡고 매직 킹덤의 초현실적인 파스텔색 성(城)을 향해 달려가던 마지막 쇼트가 뇌리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실제로 아이폰으로 찍은 15초 남짓의 ‘게릴라 촬영’이라고 들었다. 디즈니월드 측에서 공식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에, 제작진은 엄격한 촬영 규정을 ‘꿈꾸는 아이들의 돌진’이라는 에너지로 돌파해 버렸다. 스크린 속 초점이 살짝 흔들리고, 사운드가 뭉개진 탓에 영상은 다소 투박했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이야말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주는 짜릿한 전율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무니와 같은 아이들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니오’였다. 여름 휴가를 계획할 때마다 올랜도의 놀이공원 패키지 가격을 비교했지만, 그 근처 모텔 주차장에 풀썩 주저앉아 햄버거를 먹는 모녀를 상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내 무심함을 낱낱이 폭로했다. 가난이 ‘안타까움’이라는 단어만으로 치유되지 않으며, 빈곤선 아래의 일상은 우리 삶 바로 옆구리에 거칠게 붙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매달 후원하는 어린이 단체 정기 모금을 10달러씩 늘리기로. 그것이 거대한 시스템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헨리가 “아이 한 끼만 먹여 달라”고 손 내밀 때 모른 척했던 행인들 사이에 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두려웠다. 어쩌면 노란 셔츠를 입고 매직 캐슬 복도를 걸어가다 무니가 건네는 하이파이브를 받아 주지는 못했더라도, 아이스크림 값을 대신 내 줄 수 있는 어른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본 뒤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언젠가 올랜도로 여행을 간다면, 디즈니월드만 둘러보는 대신 주변 모텔 거리도 걸어볼 것. 그리고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오늘 하루는 재밌었니?”라고 웃어 보일 것. 그것이 무니가 내게 건넨 ‘마법의 팔찌’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례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