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파더 – 시간의 미로에 갇히다
영화를 처음 마주한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더듬었다. ‘지금이 몇 시지?’라는 평범한 질문이 이토록 절박했던 적이 있을까. 안소니가 잃어버린 시계를 찾아 방 안을 서성이는 장면은 단순한 분실 소동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가 무너지는 절규였다. 영화는 그의 하루를 잔혹하게 해부한다. 따뜻한 아침 햇살과 간호사의 안부 인사가 막 스쳐 갔는데, 곧이어 들이닥친 어스름 속에서 관객은 방금 존재하던 오전 열한 시를 확인할 길이 없다. 사라진 것은 시곗바늘이 아니라 시곗바늘이 가리키던 기억이다. 나 역시 극장 암흑 속에서 어제 저녁 메뉴, 일주일 전 약속 장소를 더듬었고, 팬데믹이 흐트러놓은 일상의 리듬 위로 치매 환자의 뒤틀린 시간 분포가 겹쳐지며 소름이 돋았다. 영화는 친절한 이정표를 달아 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의 기억력과 상상력을 시험하며, 과거·현재·미래를 한데 겹쳐 놓은 서랍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젊은 딸의 웃음이 들리던 바로 그 자리에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울리고, 우리는 선형적 시간관이 해체되는 광경을 목도한다. 암전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공포는 “끝났다”가 아니라 “계속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시간과 기억은 결코 멈추지 않은 채 우리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나는 그 두려움을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몸으로 겪었다.
더 파더 – 집이라는 감옥, 혹은 안식처
‘집’이라 불리는 장소가 품은 온기는 더 파더에서 몇 초 만에 얼음으로 식는다. 안소니가 자랑하던 런던 아파트는 거울처럼 닮은 복도가 시야를 가르고, 낯익던 벽걸이 그림이 순서를 바꾸며 “여기가 네가 알던 곳이 맞느냐”고 속삭인다. 따뜻한 조명이 흐르던 램프가 차가운 형광등으로 바뀌는 순간, 가족 사진도 사라진 벽은 고백한다. ‘여긴 감옥이야.’ 치매라는 간수는 수갑 대신 안락한 소파와 클래식 스피커를 배치해 탈출 의욕을 앗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소니는 원한다면 떠날 수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요양원 방이 준비돼 있고, 간호사가 상주하며 식사는 규칙적으로 제공된다. 그럼에도 그는 소리 높여 외친다. “This is my flat, and I’m not leaving!” 그 외침 속엔 집이 곧 자신이라는 절박한 동일화가 숨어 있다. 레코드, 낡은 가구, 찬장 속 티백 하나까지 그의 역사를 증거한다.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안소니’로 존재할 수 없다. 영화는 관객을 그 절벽 끝에 세운다. 문손잡이가 잠기는 소리에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돌봄이 빠진 자리에서 공간은 잔혹한 포획 장치가 되고, 반대로 따뜻한 손길이 스미면 같은 공간이 안식처로 호명된다는 것을. 작품이 남긴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어떤 집을, 어떤 마음으로 짓고 살 것인가?’
더 파더 – 관객을 흔드는 공간‧카메라 미학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카메라는 연극 무대 조명처럼 제한적이면서 치밀하다. 롱테이크로 이어지다 불현듯 끊기는 편집, 안소니의 어깨 너머를 낮게 훑는 로 앵글, 초침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는 클로즈업이 교대로 등장하며 관객의 호흡을 조율한다. 복도에서 카메라가 인물보다 한두 걸음 뒤에 설 때마다 ‘저 문을 열면 거실이 나올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기다릴까’ 하는 불안이 몰려온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스테디캠은 치매 환자의 비틀거림을 심리적 진동으로 전이하고, 정면 클로즈업은 배우 눈동자 속 잔광을 포착해 초점을 잃어 가는 영혼의 미세지진을 시청각 언어로 번역한다. 관객은 어느새 스크린을 바라보는 제삼자가 아니라 안소니의 두개골 안쪽에 갇힌 동행자가 된다. 냉장고 모터음, 수도관 울림 같은 생활 소음까지 복선처럼 배치돼, 우리는 ‘능동적으로 의심하는 연출의 공범’이 된다. 평소 프레임을 의식하지 않던 나조차 이 영화 앞에서 ‘프레임이 이렇게나 협소할 수도 있구나’라는 공포를 체험했다. 젤러는 시각 언어만으로 거대한 내면 지도를 그려 냈고, 엔드 크레딧이 흐를 때까지 나는 의자 깊숙이 파묻힌 채 풀려난 듯 풀려나지 않은 숨을 토해냈다.
더 파더 – 언젠가는 다시 꺼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내 눈앞엔 젖어 있는 내 마스크가 놓여 있었다. 안소니의 마지막 독백—“잎사귀가 다 져 버린 것 같아”—가 그 젖은 자국 위로 스며들었다. 치매를 겪는 이는 기억이라는 잎을, 돌보는 이는 인내라는 잎을, 관객은 무관심이라는 잎을 떨군다. 잎을 잃어도 나무는 서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를 증명하기 어려워진다. 외할머니가 가족과 같은 시간을 살다가 조금씩 다른 시간대를 살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시차를 오류로만 여겼다. 더 파더는 그 차이를 ‘또 다른 세계의 법칙’으로 바라보라 속삭였다. 그곳은 공포스럽지만 애틋하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 문턱에 설 것이고, 누군가는 우리의 손을 잡고 “괜찮아요, 화창한 날 산책 나가요”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래서 극장을 나서며 나는 서둘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상의 시차를 메우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 안부라는 두 글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멈춘 듯 돌아가는 시계 초침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기억이 언젠가 나를 떠나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마음만은 기억하고 싶다.’ 안소니가 끝내 잊지 못한 딸들의 이름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남고 싶다. 영화 속 건반 음처럼 잔잔하지만 단단한 결심 한 조각이 내 안에 남았다. 다음에 다시 이 영화를 꺼낼 용기는 아직 없지만, 또 한 번의 계절이 스러질 즈음 나는 분명 시계를 찾아 그 미로로 걸어들어갈 것이다—망설임과 설렘이 공존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