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시크릿 스크립처 – 기억의 미로여행

The Secret Scripture 포스터
The Secret Scripture 포스터

더 시크릿 스크립처 – 기억과 진실의 뒤엉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푸른 물결이 들이치는 슬라이고 해안 절벽 위, 백발이 성성한 로즈가 바람에 맞서 서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바다는 거울처럼 반들거리지만, 그녀의 눈빛은 칼날처럼 흔들렸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 구조는 바로 그 눈빛과 같다. 과거와 현재, 사실과 감정, 병실 침대와 성당 제단이 뒤엉켜 퍼즐처럼 깔려 있다가, 관객이 손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야만 겨우 모양을 드러낸다. 로즈가 벽 속에 숨겨 놓은 성경—‘스크립처’—는 단순한 일기장이 아니라 그녀의 두개골 안을 촘촘히 모사한 지도다. 하지만 지도라고 해서 길이 친절히 표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꾹꾹 눌러쓴 잉크 자국은 증언이자 주술이고, 때로는 자기기만이다. 감독 짐 셰리던은 이 회상 구조를 통해 “기억은 늘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라는 자명한 사실을, 관객이 먼저 믿고 있던 체계를 흐트러뜨리며 증명한다. 시종일관 흐림과 맑음이 교차하는 촬영은 물기가 스민 옛 사진처럼 선명하면서도 번지는 경계를 반복한다. 덕분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를 자연스레 질문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질문 자체가 로즈가 반세기 동안 병원 벽을 긁으며 싸워 온 주제라는 점이다. 그녀는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는 기억을 부여잡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나 자신을 증언하겠다”는 의지로 종이를 덮어 나간다. 즉, 이 영화는 한 개인이 글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 내는 과정이자, 우리가 기억이라는 구불구불한 미로 안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쥐고 가는 작은 실뭉치에 관한 이야기다. 관객으로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낡은 성경장 사이에 숨겨진 꽃잎처럼, 언제 부스러져 버릴지 모르는 연약한 진실을 조심스레 뒤적였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내 가슴 언저리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와 닮아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더 시크릿 스크립처 – 사랑과 광기로 물든 아일랜드

1942년, 나치의 비행기가 영국 본토를 할퀴고 지나가던 바로 그 시절이라지만, 아일랜드의 작은 어촌은 여전히 가톨릭 성모상이 내려다보는 돌담길과 피트 냄새 나는 벽난로 불길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 등장한 스핏파이어 전투기 조종사 마이클은 삽시간에 촌락의 파란 하늘을 뒤집었다. 햇빛을 눈이 부시게 반사시키며 내려앉은 그의 군복은, 전장 이야기에 목마른 소년들에겐 모험담의 등불이었고, 남몰래 숨죽여 살아온 로즈에게는 희망과 도피가 뒤섞인 새로운 공기였다. 반면 신부 가우든은 자신의 검은 성직복 아래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외부 폭력이, 고요한 섬마을 내부의 억눌려 있던 욕망을 촉발시키는 구조는 아이러니하다. 영화 속에서 로즈의 붉은 코트는 빗속에서도 눈부시게 강조되는데, 그 색감이야말로 사랑과 광기가 똑같이 들러붙어 서로를 물들이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성가대 연습실을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아래, 로즈와 마이클이 짧게 마주치는 시선은 살갗이 맞닿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번갔다. 그 눈빛 한 번으로 세 사람—로즈, 마이클, 가우든—의 인생 궤도가 순식간에 요동친다. 감독은 이 사랑 서사를 한 편의 고딕 로맨스로 꾸미되, 전쟁의 포화음과 폭격 배경을 음향 설계로 끼워 넣어 “연애조차 전장 위에 놓인 함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엔 ‘사랑은 파도, 광기는 조류’라는 문장이 맴돌았다. 파도는 처음엔 배를 흔드는 설렘이지만, 무심코 깊은 데까지 끌어당겨 한순간에 모든 균형을 앗아간다. 그렇게 로즈가 빨려 들어간 바다는, 어쩌면 전쟁보다 더 무정한 인륜의 폭풍일지도 모른다.

더 시크릿 스크립처 – 여성의 목소리를 가두는 교회와 사회

갇힌 공간은 병원 담장뿐이 아니다. 신부의 고해소, 목재 벽, 베이지색 스크럽이 뒤엉킨 정신병동, 심지어 촘촘히 얽힌 로마 가톨릭 교리서까지—모두가 로즈의 언어를 삼켜 버리는 음소거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는 여성이 목소리를 얻기 위해 끝내 자신의 살갗과 종이를 맞바꾸어야 했던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로즈가 ‘비로드 시트의 순결’이라는 묵중한 잣대로 평가받는 장면은, 마치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재판정이 되어 여성의 존재를 심문하는 듯 불편하다. 진짜 공포는 폭력이 아닌 합의된 침묵이라는 메시지가 이때 번뜩인다. 미신과 신앙, 관습과 권력의 결탁은 로즈를 ‘환자’로 세탁하고, 그녀가 낳은 아이를 ‘죄의 증거’로 몰아붙인다. 여기에 전쟁 중립을 천명한 아일랜드 특유의 정치적 고립감이 더해지며, 여성 한 사람의 몸은 곧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싸움터로 격상된다.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로즈를 둘러싼 벽은 과연 20세기 중반에만 존재했을까?”라는 끈질긴 물음에 붙잡혔다. SNS라는 자유로운 광장이 생긴 지금도, 여성의 목소리가 여전히 댓글 속 돌팔매질과 의심의 눈초리를 마주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즈의 낡은 성경장은 결국 현대의 타임라인과 맞닿아 있다. 글을 쓰고, 삭제하고, 다시 쓰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우리 모습이 그 속에 겹쳐 보일 때, 영화는 관객의 뺨을 서늘하게 스친다.

더 시크릿 스크립처 – 사랑의 눈물자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마치 바닷바람이 스크린 너머로 불어와 극장 안 공기를 한 톤 낮추는 듯했다. 로즈가 남긴 문장은 결국 “사랑으로 본 것은 모두 진실이다”라는 듯하지만, 나는 그 말이 ‘사랑으로만 볼 때에 한해’라는 위험한 조건부 진술임을 깨달았다. 영화는 기억이란항상 주관적이며, 사랑조차 왜곡된 거울을 통해 반사될 수 있다는 진실을 보여 준다. 나는 종종 내 과거를 떠올릴 때, 편집된 위로만 남기고 불편한 기억은 무의식의 서랍 속에 봉인해 둔다. 로즈의 붉은 글씨는 그 서랍 문짝을 무자비하게 열어젖힌다.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어쩌면 기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행위가 곧 자가 치료이고, 글쓰기란 자의든 타의든 그 치료 기록이 아닐까. 돌아오는 버스 안, 창밖으로 스르르 스쳐 가는 가로등에 비친 내 얼굴이 잠깐 로즈와 겹쳐 보였을 때,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남길 수 있는 진짜 메시지는 사실 한 줄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사랑했고, 그래서 견뎠다.” 로즈가 스크립처에 밑줄을 긋듯, 나도 마음속 노트에 그 문장을 썼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내 기억들이 하얗게 바스러져 흩어질지라도, 사랑 때문에 흘린 눈물만큼은 끝내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걸. 그건 어쩌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또 누군가를 진심으로 통과시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국이었다. 나는 그 자국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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