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모든 것 – 경계의 모성

내 어머니의 모든 것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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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 경계 허무는 기이한 모성

‘모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흔히들 따뜻하고 둥근 품, 희생과 보호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알모도바르가 그려 낸 마누엘라는 그런 단정한 틀을 산산이 부순다. 그는 첫 장면부터 아들이자 친구 같은 에스테반과 마치 ‘두 동료’처럼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무너진다. 그 무너짐은 흔히 보아 온 오열과는 다르다. 마누엘라는 곧장 스스로의 세포를 늘려 더 많은 사람들을 품으려 한다. 피가 섞이지 않은 로사와 아그라도, 그리고 마약으로 방향을 잃은 우마까지—그녀는 자신의 애도 에너지를 나눔으로써 발산한다. 흥미로운 건 그 확장이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산모와 조산사, 트랜스젠더와 비(非)트랜스, 배우와 관객, 심지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놓여 있던 투명한 칸막이가 그녀의 손길만 스치면 사라진다. 영화 후반, 마누엘라가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히 로사의 산모 방을 오가는 장면에서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새삼 떠올렸다. 어머니를 뜻하는 라틴어 mater는 ‘재료’를 뜻하는 materia와 뿌리가 같다. 알모도바르의 카메라는 이 뿌리를 끈질기게 파고든다. 마누엘라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료’로 쪼개 타인의 구멍 난 삶을 메운다. 피곤해 보이지만, 그 피로가 오히려 그녀를 단단히 눌러붙게 만드는 접착제처럼 작용한다. 나는 이 기이한 모성의 파문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 온 ‘어머니’라는 도형이 사실은 굴곡 많고 다공성인 스펀지에 가깝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이 스며들수록 부풀어 오르듯, 사랑을 흡수할수록 그녀는 더 커진다. 그 확장은 상실을 복붙해 메우는 임시변통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발명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 전통 가족 해체와 재구성

마누엘라가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우비를 뒤집어쓰고 택시를 잡던 날, 오래된 ‘가족’ 정의는 이미 퇴근하고 없었다. 영화 속 가족들은 피·혼인·혈통으로 묶이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울어 준 경험’이 족보의 빈 칸을 채운다. 롤라가 사라져 버린 탓에 뿌리가 끊긴 에스테반, 신념 때문에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난 로사, 무대 위에서만 생존하던 우마, 그리고 “안녕, 인공 유방 장착 완료!”라고 쾌활하게 외치는 아그라도까지—이들은 각자의 결핍을 품고 떠돌다 마누엘라의 중력에 끌려 하나의 궤도로 모인다. 그 궤도는 전통적 의미의 ‘집’과는 다르다. 정해진 가장도, 고정된 주소도, 명시된 규칙도 없다. 대신 규칙 아닌 합의가 숨 쉬고, 핏줄보다 굳건한 비밀이 공유된다. 알모도바르는 이 임시적 공동체를 라스 파우시스 병원 복도, 가우디 성당 공사장, 그리고 붉은 벨벳 커튼 뒤 무대 같은 이동식 공간에 배치해 놓는다. 매번 장소가 달라져도 가족은 자리를 잃지 않는다. ‘같이 있는 시간’이 공간을 대체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을 볼 때마다 고정관념의 목줄을 벗는 쾌락을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조차 1인 가구, 돌봄 네트워크, 비혼 동거가 보편화되는 지금,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가족 정의의 선을 더 멀리 그어 보라고 속삭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도를 통과해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를 제도로 삼는다. 관객인 나조차 어느새 그 가족 사진 속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내게서 필요한 것을 가져가.” 마누엘라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고, 나는 그 한 마디가 헌법 몇 조보다 견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 트랜스젠더 롤라의 파격 서사

롤라는 화면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파격’으로 명명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식 파격은 단순한 충격 효과가 아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사실보다 더 눈부신 것은, 그녀가 타인의 서사를 무한히 생성하는 ‘기점’처럼 기능한다는 점이다. 에스테반과 로사의 생명 줄기가 그녀에게서 뻗어나왔고, 마누엘라와 우마의 인생 궤도는 그 줄기를 따라 엇갈리고, 또 다시 만난다. 알모도바르는 이 선들을 레이스처럼 교차해 롤라를 서사의 ‘모태(母胎)’로 제시한다. 사회는 롤라를 ‘바깥’에 두지만, 영화는 그녀를 ‘중심’에 앉힌다. 택시 안에서 첫 등장할 때 롤라가 내뿜는 담배 연기는, 그 잿빛이 흩어지며 카메라 렌즈를 희끗하게 덮고, 곧이어 다른 인물들의 장면으로 슬며시 전이된다. 연기가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간만큼, 그녀의 영향력도 퍼져 나간다. 마누엘라가 롤라를 만났을 때 들려주는 “당신은 여전히 에스테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라는 대사는, 성별 이분법을 뚫고 존재를 횡단한다. 롤라는 ‘어머니’라는 말이 품은 양육·탄생·보호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아버지’라는 이름이 담은 결핍·부재·갈망의 상징까지 한 몸에 두른다. 이 아이러니는 캐릭터를 낭만화하지도, 희화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복합성을 그대로 두어 조용한 존엄을 확보한다. 캐릭터가 클리셰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을 자유까지 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을 보며 현실의 롤라들—화려한 조명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트랜스젠더 사람들이—존재 자체로 서사의 시작과 끝이 될 권리가 있음을 새삼 배웠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 생각이 끊이지 않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오렌지빛 배경 위로 춤추듯 올라갈 때, 내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전 꺼내지 못한 이름 하나가 불시에 소환됐다. 내 청춘 시절, 세상과 불화하며 손톱을 물어뜯던 친구였다. 그는 ‘가족’을 혐오했지만 동시에 갈구했고, “나는 언제쯤 안전한 품에 안길까?”라고 종종 읊조렸다. 영화관 어둠 속에서 롤라·마누엘라·로사가 엮어 낸 임시 가족을 바라보며, 나는 그 친구의 외침을 20년 만에 재생 버튼 눌러 듣는 기분이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슬픔을 영광처럼, 차별을 농담처럼, 경계를 모험처럼 변주한다. 화면이 닫히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더 이상 ‘정상 가족’에 집착하던 과거의 나와 동일인이 아니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이야기는 내 일상으로 흘러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전화기 주소록을 훑었다. ‘가족’으로 저장해 두지 않았지만, 새벽 두 시에도 달려와 줄 친구들의 이름 옆에 별표를 붙였다. 그리고 다짐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이 옅어지는 건 아니라고, 또 세상이 정한 울타리를 넘어서는 순간이야말로 진짜 ‘모성’과 ‘연대’의 탄생이라고. 영화 속 마누엘라가 새 생명을 품에 안으며 속삭이듯, 나 역시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랑은 경계 위에서 자랄 때 가장 강해진다.”그 말은 마치 오래전 친구가 남긴 미발송 편지를, 시간 너머에서 대신 읽어주는 듯했다.나는 그 문장을 내 내면 어딘가 깊숙한 곳에 천천히 눌러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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