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숨 쉬는 공기 – 운명에 숨결을 불어넣다

The Air I Breathe Poster
The Air I Breathe Poster

내가 숨 쉬는 공기 – 네 감정의 사중주

영화는 ‘행복·쾌락·슬픔·사랑’이라는 네 개의 감정을 사중주 악장처럼 배치한다.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되는 재즈 같지만, 각 악장은 서로의 테마를 변주하며 묘하게 맞물린다. 첫 악장 ‘행복’에서는 모든 것을 계획대로 쥐락펴락하는 증권맨 ‘프리즌’이 등장한다. 그는 정보가 주는 짜릿한 우월감에 취해 있지만, 관객은 그 눈빛 저편에서 이미 균열음을 듣는다. 두 번째 악장 ‘쾌락’은 갱의 심부름꾼 ‘플레저’를 통해 미래를 ‘살짝’ 엿보는 능력이 주는 환희와 공포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이어지는 ‘슬픔’ 악장에선 가수 ‘트리샤’가 스타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드리운 외로움을 체득하고, 마지막 ‘사랑’ 악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면 의사 ‘브렌던’이 타인의 생명을 되살리려다 자신 또한 구원받는 구조가 완성된다. 각각의 파트는 독립적 단편처럼 보이지만, 카메라가 도심 고층 빌딩을 가로지르고, 총성의 여운이 클럽 스피커 속 베이스음으로 겹치고, 주인공들이 잠깐씩 서로의 시야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마다 우리는 네 줄 현이 동시에 울리는 묘미를 느낀다. 영화 속 도시가 마치 거대한 콘트라베이스 같다면, 관객인 나는 그 현을 울려 얻어지는 저음을 가슴팍에서 진동으로 겪는다. 그러다 보면 ‘행복은 쾌락을 낳고, 쾌락은 슬픔을 부르고, 슬픔은 사랑을 갈망한다’는 감정의 파동이 우리 일상에도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숨 쉬는 공기 – 운명을 넘보는 예언

‘플레저’가 가진 예지 능력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에 가깝다. 그는 몇 초 뒤의 미래를 거의 확실히 본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미리 듣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재미를 잃듯, 그는 자신의 삶에서 놀라움과 선택지를 빼앗긴다. 더 비극적인 점은, 미래를 안다고 해서 변경할 힘까지 생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총알이 날아오는 각도를 이미 알고도 피하지 못하고, 친구가 흘리는 눈물을 예측하고도 닦아 주지 못한다. 영화는 이 모순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알고도 못 바꾼다’는 명제는 우리에게 숙명론적 한숨을 내쉬게 하지만, 동시에 ‘알기 전까지는 영영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건넨다. ‘플레저’가 결국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던 가수 ‘트리샤’를 구하려고 나서는 순간, 관객은 스크린 속에서 최초로 궤도를 이탈한 미래를 목격한다. 그것은 예지력을 뛰어넘어 ‘행동’이라는 숨결을 불어넣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스마트폰 알림이 일러 주는 주가 예측이나 날씨 예보조차 ‘지나치게 상세한 미래’가 아닐까 반문해 본다. 알려 주기만 하고 바꿀 권한은 주지 않는 정보들 속에서, 우리의 오늘은 얼마나 자동 조종되고 있을까? 결국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간단하다. “예언이 내다본 길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왜 그 길을 벗어나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 태어난다.”

내가 숨 쉬는 공기 – 갱스터 ‘피걱’의 딜레마

네 악장의 리듬을 실제로 맞추는 지휘자는 갱 두목 ‘피걱(핑거스)’이다. 그는 돈과 폭력을 이용해 인간의 감정을 거래한다. 트리샤에게선 노래할 자유를 담보로 음반 매출을 뜯어 가고, 플레저에게는 ‘네가 본 미래’를 핑계 삼아 목숨 값을 선불로 챙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냉혹한 수단을 구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내면은 영구 동결된 아이처럼 허기를 호소한다는 점이다. 그는 애완 뱀을 쓰다듬으며 “넌 거짓말을 못 하겠지?”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대사는 폭력조직이란 커다란 갑옷 속에 숨은 두려움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 피걱은 예측 불가한 ‘사랑’ 악장을 맞닥뜨리며 처음으로 게임의 룰을 잃는다. 그는 들끓는 총기 연기 속에서 플레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만, 총알이 궤도를 꺾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듯한 반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다. 관객 입장에서 그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폭력은 언제나 되돌아오는 부메랑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부메랑이 스크린만큼 정확히 주인을 찾아가진 않는다. 그래서 피걱의 최후를 보며 나는 ‘도시는 아직도 수많은 피걱을 키우는 중’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동시에 영화가 촉발한 질문—“폭력의 고리를 끊는 건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잔향으로 남는다.

내가 숨 쉬는 공기 – 네가지 감정

스스로를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던 감정들을 영화는 네 개의 유리병에 담아 내 앞에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퍼져 나온 것은 달콤함이나 청량감이 아니라, 오히려 눅눅하게 곰팡이 핀 숨결이었다. 행복이 탐욕으로, 쾌락이 중독으로, 슬픔이 냉소로, 사랑이 집착으로 상할 수도 있음을 영화는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나는 상영관을 나와 지하철 플랫폼에 섰을 때, ‘내가 지금 들이마시는 공기는 어떤 맛일까?’를 처음으로 의식했다. 핸드폰 화면을 스치듯 넘기며 얻는 쾌락이 ‘플레저’의 예측처럼 허무로 귀결될 것 같았고, 출근길에 따라오는 회색빛 먼지는 ‘행복’의 광택을 닦아 버릴 성싶었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했다. 내일 아침엔 한 정거장 미리 내려서 15분쯤 걸어 볼 것,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도시의 생활음을 듣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것, 그리고 “이 순간 숨 쉬는 공기는 분명 온전하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여 볼 것. 영화 속 인물들이 몸으로 증명해 준 건 결국 ‘호흡은 선택’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들이마시고 내쉬느냐에 따라, 미래는 수치만큼 정교한 예언이 아니라 숨결만큼 유연한 가능성으로 변한다. 그 가능성의 물결을 믿고 싶어, 오늘 밤 나는 복잡한 도심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가에 입김을 불어 본다. 흐릿한 김 서림 뒤로 네 개의 색이 번지듯 겹쳐지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공기를 숨 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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