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북 – 품위 있는 피아니스트의 외로움
뉴욕 카네기홀 위층, 벨벳 소파와 에메랄드색 램프가 놓인 응접실 한가운데에서, 돈 셜리 박사는 언제나 곧게 세운 허리로 앉아 있었다. 스스로를 “셰브러-빌트 버건디 피아노”라든가 “아쿠아리움 속 홀로 남은 흑단 해마”에 비유하곤 하던 그는, 왕좌처럼 높이 올린 무대 좌석에 앉아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을 때조차 웃음 대신 단호한 침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흑인으로서 유럽 클래식 콘서트홀을 제 집처럼 드나든 선구자, 코튼필드의 한숨 대신 쇼팽의 녹턴으로 밤공기를 채워 넣은 귀족적 예술가. 하지만 우리 눈에 반짝이는 그 화려한 수식어가 그의 일상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들었는지 영화는 수묵화처럼 번지는 장면으로 비춘다. 셜리의 집무실엔 왕관이 달린 금빛 거울, 수백 권의 가죽 제본 서적, 각국 대사로부터 받은 훈장이 호화롭게 걸려 있지만, 커다란 의자에 혼자 앉아 진한 위스키를 홀짝이는 늦은 밤이 되면, 그 어디에도 “동료”는 없었다. 흑인 커뮤니티로부터는 백인처럼 군다며 “당신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비난을, 백인 엘리트로부터는 “제법 점잖은 예외적 흑인”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운명. 품격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높아질수록 인간 셜리는 좁은 탑 속에 종이 인형처럼 갇혀 들어갔다. 남부 투어를 떠나기 직전, 셜리가 눈을 감고 건반에 손을 올리는 클로즈업을 떠올려 보라. 손끝은 왕의 봉처럼 우아하지만, 눈꺼풀 아래 떨림은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두려움과 깊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는 투어 동행 운전기사 면접을 볼 때 첫인상만으로 토니를 가려냈다. 입은 욕설을 달고 살지만 악의를 품지 않고, 주먹은 거칠지만 선의가 단단한 그 이탈리아계 남자를 보며 셜리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나를 보호할 힘이 있고, 무엇보다 나를 한 인간으로 대할 농담을 할 것이다.” 피아니스트에게 품위는 무대 위 브로케이드 재킷이 아니라, 무대 밖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켜 줄 단 한 명의 친구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셜리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비단 셜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SNS 팔로어 수, 명함에 새긴 직함, 학위와 스펙이 만든 고층 탑에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를 연출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계단은 손을 내밀 친구가 올라오기엔 가파를 뿐이다. 셜리가 보여 준 은밀한 취약함은 품위와 고립 사이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그린북 – 편지로 피어나는 우정
토니 발레롱가의 첫 편지는 엉망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두꺼운 크레용으로 쓰다 만 일기를 찢어붙인 것처럼, 맞춤법은 허공을 떠돌고 문장은 반쯤 끊긴 채 끝났다. 스스로를 “글자 알레르기가 있는 놈”이라 자조하던 토니지만, 카디건 주머니에서 구겨진 편지를 꺼내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만큼은 섬세한 소년으로 돌아갔다. 셜리는 그런 토니를 보며 조용히 웃고 곧장 적색 잉크 펜을 꺼내 들었다. “Dear 돌로레스—”로 시작하던 투박한 안부는 셜리의 손끝에서 “눈 덮인 고향 골목 냄새가 그립다”는 시어로 변했고, 간결한 복장 보고 같은 문장은 “당신이 빈 방을 돌아다닐 내 걸음 소리가 빨리 따라가길 바란다”는 로맨틱한 고백으로 탈바꿈했다. 펜촉이 종이를 미끄러질 때마다 불균형한 두 남자의 거리도 조금씩 줄어들며, 편지는 단순한 연애 편지를 넘어서 둘 사이 숨겨진 마음의 번역기가 되었다. 토니는 “나는 틀린 말투를 썼어도 당신이 내 진심을 알아줄까 겁났다”는 속내를 셜리에게 고백했고, 셜리는 “나는 평생 옳은 말투로 말했지만 누구도 내 내면을 보려 하지 않았다”는 외로움을 털어놨다. 다름을 인정하고 단점을 보완해 주는 과정에서 탄생한 편지는, 결국 토니 가족의 거실 난로 위 작은 틀에 담겨 두고두고 읽힐 따뜻한 기록이 된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편지”라는 아날로그 소통은 갈수록 낯설어지지만, 마음이 구겨졌을 때 종이와 펜이 전하는 울림은 여전히 스마트폰 알림음을 압도한다. 그린북은 말한다. “틀린 말이 두려워 침묵하기보다, 서툰 손으로라도 한 줄 적어 내보내는 방법을 택하라.” 그 어눌함은 누군가에게 “교정받을 기쁨”이자 “교감할 발판”이 되어 돌아온다. 셜리가 토니 편지를 다듬어 주며 느낀 작은 뿌듯함, 토니가 그 편지를 들고 눈시울을 붉힌 아내에게 포옹 받는 장면은, 트윗 한 줄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증명한다.
그린북 – 미국 남부를 달리는 캐딜락
극 중 캐딜락 드빌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1962년의 푸른 피염을 머금은 그 길고 묵직한 차체는 ‘차별’이라는 거친 도로를 헤쳐 나가는 일종의 시간 캡슐이자, 두 남자의 화해 실험실이다. 북부 뉴욕을 떠날 때 차창 밖으로 스쳐 간 풍경은 높은 주상복합과 크리스마스 쇼윈도였지만, 메이슨딕슨 라인을 넘자마자 자줏빛 목화밭과 낡은 간판이 연달아 버퍼링 없이 재생됐다. 도심의 세련된 환대를 뒤로한 셜리는 남부 호텔 프런트 앞에서 “흑인 연주자는 뒤뜰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토니는 그와 동시에 “짙은 머스코기 악센트” 경찰에게 뺨을 맞는다. 주행 중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샘 쿡의 ‘That’s It, I Quit, I’m Movin’ On’을 토니가 신나게 따라 부를 때, 셜리는 차분히 고개를 젓는다. 토니는 “당신네 흑인들은 이런 노래 안 좋아하냐?”라며 헤드뱅잉을 멈추지 않지만, 셜리는 말한다. “나는 모차르트로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다.” 좁은 캐딜락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냄새가 번갈아가며 창문을 두드리는 동안, 두 남자는 앞좌석과 뒷좌석을 바꿔 앉기도, 수납함에 있던 KFC 박스를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프라이드치킨이 기름 줄줄 흘러도 손가락 빨며 맛나게 먹을 줄 아는 토니와, 냅킨 없이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셜리의 갈등은 사소하지만 본질적이다. 그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브레이크를 잡고 액셀을 밟으며 겪는 충돌은, 피부색·계급·학력·취향·말투가 서로 다른 공동체가 마주치는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렇기에 남부 최고의 명문 컨트리클럽에서 연주를 마친 뒤, 실크 보타이를 맨 셜리가 “나는 여전히 여기 화장실을 못 쓴다”는 사실을 토니에게 털어놓는 장면은 차창 너머의 어두운 고속도로만큼이나 암담하다. 하지만 두 남자는 다시 시동을 건다. 12월 밤, 폭설이 몰아치는 고향 뉴욕으로 캐딜락이 귀환할 때, 차체는 소금물에 얼룩지고 타이어는 닳았지만 동승자들의 마음은 더 견고해졌다. 자동차 라디에이터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가기까지 반복한 여덟 주 간의 주행이 있었기에, 셜리는 토니 가족 앞에서 주저 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용기를 얻게 된다.
그린북 – 나의 시선을 바꾸는 영화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로비를 나오는데, 휘황한 크리스마스 장식 조명 아래에서 흑인 청소 노동자 두 사람이 웃으며 창틀에 낀 눈송이를 털고 있었다. 순간 나는 스크린 속 셜리가 떠올랐다. 여전히 21세기 한복판에서 차별은 산업화된 장난감처럼 끝없이 재생산되지만, 토니 발레롱가 같은 사람도 곳곳에 존재할 거라 믿고 싶어졌다. 그린북은 “저마다의 품위가 타인의 품위를 만날 때 진정한 존엄이 완성된다”는 뻔한 말을, 뻔하지 않은 방식—담백한 농담과 클래식 선율, 허름한 다이너의 튀김 냄새로 들려준다. 내게도 편견은 있다. 다름 아닌 ‘나는 편견이 적은 편’이라는 오만. 영화가 다가와 톡 건드리자 그 착각은 팔꿈치에 달라붙은 기름때처럼 쉽게 드러났다. 지하철에서 영어가 서툰 어르신을 보면 눈을 피하곤 했고, 동네 치킨집 청년에게 “어딘가 거칠어 보여”라는 선입견을 씌운 적도 있다. 결국 나 역시 “컵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토니의 초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달라져야 할까? 셜리가 조용히 건넨 충고—“편지는 마음을 세탁하는 기계야”—가 힌트처럼 남았다. 오늘부터 실수투성이 손글씨라도 써보기로 했다. 편지는 오탈자를 교정하며, 내가 놓친 타인의 존엄을 교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해가 저무는 밤, 가족이든 이웃이든 낯선 택배 기사님이든, 문 앞에서 짧은 인사를 건네 볼 생각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 짧은 문장 하나로, 토니와 셜리가 캐딜락 옆에서 나누었던 따뜻한 온기를 조금이나마 복제할 수 있다면, 올해 내 식탁 위 허름한 닭다리도 별안간 로맨틱한 축배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