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아이러니한 제목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포스터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포스터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길 위에서 꾸민 대담한 작전

지소와 차랑, 그리고 동생 지석이의 ‘개 납치 프로젝트’는 겁 없고 배고픈 세 아이가 세운 생존의 각본이다. 작은 봉고차를 집 삼아 옹기종기 잠드는 밤마다, 시동 꺼진 차체는 세 식구가 품은 불안의 체온으로만 데워진다. 지소가 꾸민 계획은 허름한 구두 상자 속 우주지도와 같다. “500만 원을 손에 넣으면 평당 500만 원짜리 집을 살 수 있다.” 어른들 눈에는 터무니없이 계산이 틀린 소리지만, 아이에겐 이 논리가 현실을 건너기 위한 유일한 다리다. ‘개를 훔쳐서 사례금을 챙기고 다시 돌려주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논리는 동화적 순진함과 범죄적 대담함을 기막히게 섞어 둔다. 동물병원의 복도, 갤러리의 유리창, 폐가의 지하창고… 작전을 위해 아이들이 답사한 공간엔 CCTV와 어른의 시선이 가득하지만, 그 눈길이 포착하지 못한 빈틈을 꿰뚫는 건 아이 특유의 민첩한 상상력이다. 껌과 소시지, 종이상자, 낡은 담요 같은 사소한 물건들이 작전 아이템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결핍이야말로 가장 큰 창의력의 자궁’이라는 말을 증명한다. 하지만 관객은 곧 깨닫는다. 작전을 성사시키는 A to Z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집’에 대한 갈망이다. 계획이 진행될수록 그 갈망은 도둑질의 설렘을 압도하며, 끝내 “개를 돌려주자”는 눈물 섞인 결론으로 수렴한다. 작전의 성공 여부를 떠나, 지소가 진짜 훔치고자 했던 건 한밤에도 문단속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단단한 지붕 한 장이었음을 영화는 조용히 고백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김혜자·최민수, 동화 같은 호연

이 영화가 뿜어내는 따뜻한 장력의 절반은 김혜자와 최민수가 앙상블로 만들어 낸다. 김혜자가 연기한 마르쉐 노부인은 검은 정장과 진주 귀걸이를 두른 채, 뉴욕식 갤러리를 운영하는 ‘차가운 콜렉터’로 등장하지만, 카메라가 조금만 다가가면 눈빛 가장자리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회한이 잡힌다. 전부를 잃고도 단 한 장의 그림과 단 한 마리의 개—원리—만으로 삶을 붙들고 있는 노부인의 결핍을 김혜자는 목소리의 높낮이 대신 호흡 간격으로 표현한다. 반면 최민수가 분한 노숙자 ‘대포’는 지저분한 코트와 덥수룩한 수염 뒤에 철학자 같은 낙천을 숨기고 있다. “세상 전체가 내 집이지”라는 대사의 울림은, 단지 멋진 문장을 뛰어넘어 ‘소유의 무게’에 짓눌린 어른들이 잠시 놓치고 산 자유를 상기시킨다. 흥미로운 건 두 인물이 직접 마주치는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영화 전체에 깔린 정서가 두 사람의 기운으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노부인이 보여 주는 상실의 냉기가 지소에게 죄책감의 빗장을 열게 한다면, 대포가 전파하는 유랑의 온기는 아이들에게 마지막 결단을 내릴 용기를 건네준다. 김혜자·최민수라는 두 베테랑이 애써 과장된 연기를 피하고, 극도로 절제된 몸짓만으로 동화적 세계에 현실의 질량을 불어넣었기에, 관객은 ‘어린이 범죄극’이라는 가벼운 장르적 외피를 넘어 진짜 어른들의 눈물샘에 닿게 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가난과 우정이 빚은 판타지

이야기의 마디마다 가난은 해일처럼 밀려온다. 봉고차는 언제 견인될지 모르고, 엄마가 받는 퇴직금은 호텔 침대에서 흘러가는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런데 영화는 가난을 비극적 클로즈업 대신 판타지적 장치로 재배치한다. 후줄근한 차 뒷좌석은 지소에겐 해적선 선실이고, 폐가 지하창고는 비밀요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차랑은 “네가 집 없어도 우리는 계속 친구야”라는 단순한 문장 하나로, 앞세대가 만들어 둔 계급의 금을 손쉽게 넘어서 버린다. 아이들은 ‘집 있는 아이/집 없는 아이’라는 구획을 스스로 해체하고, 그 틈에 ‘개 훔치기 모험’이라는 놀이를 끼워 넣어 세상을 재설계한다. 그래서 영화 속 판타지는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라기보다, ‘현실을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마법’에 가깝다. 관객 역시 이 판타지 속에서 잠시 숨 고르며, ‘가난하면 사랑도 우정도 깎여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지소 가족이 얻는 전세집은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웃을 수만 있다면, 집은 이미 존재한다”는 우정의 선언서다. 영화는 이 선언을 전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목을 완성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란, 사실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 서로를 집처럼 여기게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내가 인간이 되는 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스크린을 박차고 나온 지소·차랑·지석·원리가 여전히 극장 공기 사이를 뛰노는 것 같았다. 영화는 내게 묻는다. “당신에게 집은 어디인가?” 보증금·평당가·전세 대출 같은 숫자를 떠올리려다, 나는 불현듯 어릴 적 기억 한 장을 붙잡았다. 여름 소나기 피하려고 친구와 뛰어든 우체국 현관, 셔터 내린 작은 공간에서 비를 피해 숨죽이며 깔깔대던 10분 남짓의 시간. 그때 친구의 옆모습이, 흠뻑 젖은 교복보다도 내게 더 포근한 지붕처럼 느껴졌다. 집은 그렇게, 함께 웃고 울며 비를 피한 순간순간의 기억으로 짜인 돔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지소가 부러웠다. 그는 가난했지만, 집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다시 정의하는 용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정의를 위해 ‘완벽한 도둑질’을 감행할 만큼 삶을 사랑했으니까. 극장을 나서며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내가 훔쳐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웃을 시간, 마음 놓고 울어도 될 시간.” 언젠가 삶이 또다시 봉고차만 한 공간으로 나를 몰아세워도, 오늘 적어 둔 이 문장을 조용히 펼칠 것이다. 그 문장이 작은 지붕이 되어줄 거라 믿으며. 언제 어디서든, 함께한 온기가 있다면 그곳이 곧 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지소처럼 나도, 내가 머무를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기댈 기억을 찾아가기로 했다.

댓글 남기기